1970년대의 국내 산악활동 [변기태]
1970년대의 국내 산악활동
변기태 (한국하켄클럽회원)
1970년대의 국내 산악활동을 돌이켜보기 위하여 월간 산지1970년1월호 부터 1980년 2월호까지 근 10년간에 걸친 자료를 검토하고 정리해 보았다.
‘70년대의 산악활동이 오늘날의 활발한 국내외 산악활동의 근간이 되었음을 의심할 바 없다. 장비면에서는 군용장비에서 그런대로 우수한 국산장비로 대체되어가고, 또 해외의 우수한 장비들이 수입되어 활발한 등반활동을 뒷바침해 주었으며, 또 인수봉 초등 50주년(‘76년)을 맞이한 초등반 심포지움에서 김정태씨, 손경석씨 양인의 초등반 연도 차이가 1926년 서울 영국영사관 부영사이었던 아처씨와 임무씨의 초등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일취월장한 기간이었으므로 손경석씨에 의하면 1970-1975의 기간을 은의 시대로, 1976-1980년을 철의 시대로 정의할 만큼 급변한 시기였다.
해설 : 후일 기록의 확인에의하여 현재는 1929년 영국인 아처가 인수봉의 기록상 초등자로 인정한다(영국산악회 보관 아처등반 보고서에 근거) 그러므로 위의 76년이 인수봉초등50주년은 지금의시점에서 착오임을 알려드립니다.
1.70년대 10년간의 암,빙벽 개척등반개요
가.등반유형별
구분 |
70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계 |
암벽 |
4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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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9 |
12 |
6 |
4 |
3 |
2 |
47 |
빙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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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
2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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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능선 종주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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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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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계 |
7 |
2 |
. |
5 |
9 |
14 |
8 |
6 |
6 |
2 |
59 |
나.등반대상지별
구 분 |
70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계 |
북한산 |
4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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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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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도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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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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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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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5 |
설악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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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4 |
7 |
3 |
2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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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기 타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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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6 |
2 |
3 |
2 |
1 |
20 |
계 |
7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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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9 |
4 |
8 |
6 |
6 |
2 |
59 |
위표에서 보듯 북한산과 설악산에서의 집중적인 암,빙벽 개척등반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해외 고산 진출을 위한 우리 산악계의 몸부림이며 전진적인 발돗음을 위한 전환기임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한국산악회의 등산아카데미가 69년 12월 20일 설악산에서 적설기 강좌를 시작으로 개교함에따라 알프스와 요세미테 스타일의 등반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암벽에서도 과거와같이 볼트하켄에 의한 무차별한 개척등반을 지양하고자하는 clean climbing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빙벽에서는 step-cutting에서 front-pointing기법이 도입되어 급기야는 토왕폭의 상하단 초등을 이룩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또한 학술 답사 등반으로는 1921년 동아일보에서 파견한 우보 민태원의 백두산 탐사등반 이래의 맥을 이어 지속적으로 추진된 기간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71-’73년간 대한 산악연맹의 지리산, 거문도, 백령도, 대청도등의 학술조사 파견과 그 보고서가 있었고, ‘73-’75년간 한국산악회 각 지부 합동의 전국 산맥답사대 파견, 1975년 8.15조국광복과 한국산악회 창립 30주년 기념의 통일기원 전국명산 등산대회, ‘76-’78년간 자연보호 실태조사(태백산,설악산, 백도)에 따라 당국에 고발조처를 취한 바있다.
이러한 산행형태가 일부에서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외면시 되기도 하였으나, 탐사등반이란 그 시대의 사회풍토와 산악관에 따라 변하는 것일 뿐이지 그 중요성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생각되어진다.
2.연도별 주요 산행기록
이제부터 연대별로 주요한 개척등반과 산일지를 통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하자.
70년은 검악산악회의 북한산 인수봉 검악길개척(70년5월31일)을그 시작으로 한다. 6월중에는 민주공화당 산악회(김창원)에서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등산 인구와 산에서의 조난 등 등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35동의 산장 신축을 추진하고 정부예산 6,000만 원을 확보하였다. 이때 등산 인구가 300만을 헤아린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내무, 법무, 국방부의 합의에 의해 1970년 7월18일 국방부 공고 제 3호 ‘유사군복의 제조, 착용과 향토예비군복 착용에 관한 공고’에 의하여 군복 및 군용장비의 민간인 휴대를 금지하고 전국 주요 산에서 군 당국에 의한 직접회수를 시작하였다.
이때 수많은 산악인들이 소지한 군용장비가 마땅한 대체 장비가 없는 가운데 많은 수난을 당하였고, 필자역시 백운산장 인근에서 군용텐트로 야영을 하던 중 장비일체를 압수당한 바 있다.
또한 지리산 일대에서는 잦은 간첩의 출몰로 육군 9530부대에서 지리산을 특정 경비지역으로 고시하게 됨에따라 ① 대한산악연맹 입산 증명 ② 등산계획서 제시 ③ 군부대나 인근경찰서 통보 ④ 등산복착용으로 구분 ⑤ 괴한 발견시 신고등의 다섯가지 사항을 엄수하여야 했다.
서울 인근 북한산에서는 크로니 산악회의 크로니길 개척(‘70년 5월 10일), M.R.S.의 숨은벽 7개코스 개척 등 활발한 개척활동이 전개되었으며, 등산 인구의 증가로 백운산장 증축을 위해 이숭녕위원장을 중심으로 백운산장 보수증축위원회가 발족되어 수용인원을 100명에서 200명으로 확장키로 하고 각 단위 산악회의 많은 지원을 받게되었다.
‘71년도에 들어서는 한국산악회주최 제1회 알파인 0.L.대회가 경기도 양주군 소리봉에서 개최 되었고(5월29일-30일),북한산에서는 인수산장과 용암산장이 개관되었다.
그러나 그해 늦가을에 급작스러운 추위로 인수봉 남측 오버행 하강코스에서 7명이 동사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급작스럽게 증가한 등산인구, 특히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산악회와 산악인구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부각시켜주었으며, 또한 체계적인 등산 교육, 조난대책의 문제가 이슈화 되기도 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남측 하강 코스에 몇몇 산악회에서 사비로 하강피톤을 보강하고, 또 후면 하강 코스의 이용도가 증가되어 안전한 하강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기도 하였다.
‘72년 봄 인수산장의 이경구씨가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이숭녕 박사의 주례로 결혼을 한 것이 가장 큰 악계의 소식이었으며,
개척 등반으로는 거리회의 인수봉 거룡길 개척(72년 5월28일)이 장봉완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산악계에 잘 소개되지도 않았거니와 뛰어난 고도감과 난이도로 한동안 등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73년도는 등반대상지가 다양하게 분포되었으며 특히 70년대 설악산에서의 등반이 시작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봉암 산악회의 속리산 입석대 볼트코스, 산천지 산악회, 아카데미 산악회의 산천지길, 아미동길이 인수봉에 개척되었고, 도봉에서는 청암산악회의 물개길, Mt.빌라의 주봉빌라길이 개척되었다.
우정산악회에서 70년대 처음으로 ’73년 5월 19일부터 23일 까지 설악산 주걱봉의 서남벽과 동남벽 2개코스를 개척함으로써 설악산의 활발한 암,빙벽등반이 시작되었다.
또한 월간 산지 만화 악돌이에서 처음으로 Jam-Nut을 소재로 한 만화가 소개되어 산에서의 볼트 하켄사용을 문제화하고 비평하였으며, 또한 빙벽 등반 기술 중 front-pointing기술의 한국에서의 적용이 적합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으나, 그때로서는 이 기술이 알프스와 히말라야에서와 같이 snow-ice에서나 적합한 기술이며, 국내 빙벽과 같은 청빙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테크닉으로 단정되는 것이 정설로 굳혀져 갔다. 사실 일본제 타니 12발 아이젠 수준이 첨단인 점을 미루어 볼때 이러한 시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비와 테크닉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M.K장비제작소(김수길씨)는 타니를 모방한 아이젠의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몇몇 산악인들은 선진국의 장비를 모방하여 아이젠과 아이스햄머를 만드는 시도를 하였으나, 그 당시 국내 철강기술의 낙후로 부러지고, 휘어지는 수준을 넘지 못함으로써 상품화에는 실패하였다. 이로인하여 등반의 경향은 빙벽과 암벽개척등반에 많은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74년 벽두, 어센트산악회에서는 1월2일부터 8일까지 전두성씨에 의해 설악산 동계 천화대 초등을 시작으로, 그해 악우회의 울산암 남서 중앙벽 직등코스개척, 에코 클럽의 토왕성폭포 우측벽 상하단 초등, 울산암 정면 칸테우측 크랙 초등으로 산악계의 해외거벽을 향한 노력들이 설악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한해였다.
또 토왕폭우측벽등반은 순수한 화강암 겔렌다를 개척대상으로 하던 산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우정,엠포르 산악회 합동의 월출산 서남벽 2개코스 개척과 인수봉, 선인봉에서 우정하늘길, 모설길, 요델바트레스등의 코스가 개척되었고, 불암산 천보암에서는 윤대표씨와 필자등에 의해 6개 코스가 한꺼번에 개척되어 인수봉, 선인봉에만 집중된 클라이머들의 욕구를 분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외 몇몇은 당시 고교생으로서 최초로 120여 미터 정도의 정규 암벽개척 등반 기록을 세웠다.
‘74년 6월15일에는 한국 등산 교육의 현장이고 전통인 등산학교(공동대표 권효섭,안광옥)가 초급반 30명을 모집하여 도봉산 도봉산장에서 개교하였다. 이 초급반에서 2명이 탈락하고 최종 28명만이 수료식을 가졌다.
또한 ‘71년도 사고 시 문제 되었던 조직적인 구조활동들을 보완하기위하여 ’74년 12월 7일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와 대한 산악연맹 주관으로 산악구조대 발대식이 있었으며,
‘67년에 U.I.A.A.가 제정한 암벽 등급 제도의 영향으로 대한 산악연맹과 악우회, 어센트, 크로니, 계우회가 주축이 되어 한국 암벽 등급 조사 연구회가 10월에 발족되어 활발한 활동이 전개 되었다.
‘1975년은 ‘70년대 산악활동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한 해에만 암벽 12개의 개척과 2개의 빙벽초등이 설악산등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산악회의 이은상 회장이 신년사에서 한산과 대산련의 두개 단체 통합 당위론을 제기함으로써 전 산악계의 호평을 받았으나, 기록에 의하면 몇몇 일부 인사의 불가론에 의해 검토가 오래 진행되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제안이 발의된 지 10년이 지난 요즘 또 다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니....
지난해 에코클럽에 이어 설악산 토왕성폭포 좌측벽을 부산의 청봉산악회에서 개척하였고, 삼악산의 구곡폭포가 어센트 산악회에 의해 초등반 됨으로써 산악인의 숙제가 하나하나 해결되어 머지않아 토왕성 폭포 초등의 서막을 예고하는 듯 하였다.
설악에서는 다양한 벽등반이 이루어졌는데 악우회의 고갈봉 중앙벽 초등, 고대 산악회의 범봉 정면벽 초 등반, 서울산악회의 1275봉 초등 등 대형 코스 개척이 줄을 이었다. 또 이러한 설악 집중도에 반하여 몇몇 산악회에서는 다양한 등반 대상지를 선정하였는데 동양산악회의 월악산 정면벽 중앙 루트개척, 고대 산악부의 거제도 해금강 해벽 초등으로 악계의 관심을 보였다.
또한 강원도에는 용평스키장이 1월 19일 개장됨으로써 산악인과 스키인들을 설레이게 하였으며,
등산 용품의 수입에 따른 영향으로 알프스 산악회의 김창배씨는 국내 최초로 핵센트릭을 제조하여 시판하였으나 국내등반의 높은 하켄 의존도와 등반의 과학적 사고가 정착되지 못한 관계로 나름대로 우수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여 상품화 되지 못하고 하나의 아이디어 단계로 끝난 것이 아쉽기만하다.
당시 필자의 장비 구입능력으로 비추어 무리하게 구입하여 사용하여 본 바 상당히 유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필자 자신도 수입 두랄류민을 구하여 청계천에서 밀링하여 직접 만들어 여러 등반에 편리하게 사용한바 있으나 이는 과학적 충격 실험 등의 테스트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또한 당시 잘나가던 등산장비점인 샤모니 산장(박흥준)에서는 윌리안스 벨트를 처음 제작하기도 하였다. 개인적 기억으로는 당시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일본 HOPE제 상단벨트나 하단벨트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제품은 full-seat harness로 상당히 편안하고 인공 등반 시에 장비를 다량으로 장착할 수 있었으며 추락 시에도 충격이 온몸으로 분산되는 좋은 장비로 기억된다.
연말경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경희대 O.B. 유재원씨에 의해 암벽 등반 그레이드 평가의 방법론적 제시가 월간산에 게재됨으로써 등급화 작업 중에 있는 그레이드 작업에 이론적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76년 1월23일 동국대학산악부에 의해 설악산 토왕성폭포의 하단 등정이 이루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학 산악부라 함은 대부분 거벽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로써 대학 산악부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고 이 등반의 여세가 80년도 마나슬루 등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
‘76년도 등반 경향으로는 지난해와 같이 설악산 등 다양한 대상으로 개척등반이 이루어지나 높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첫 시도가 악우회에 의해 인수봉에서 이루어졌다.
인수봉 15개 코스, 연장고도 2,500m를 임덕용씨 외 30명이 연결 등반에 성공함으로써 알프스의 벽을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또한 연말에는 중앙대 민족 예술 연구소의 주관으로 국내 최초의 산악영화인‘惑’(김항원제작)이 상영되었다.
또한 clean-climbing의 일환과 nuts등반의 안전성, 유용성을 실험하기 위하여 에코클럽에서는 선인봉 남측면 오버행코스를 all-nuts등반하였다. 이로서 국내 등반에 본격적인 nuts류 사용에 불을 당기고 이와 관련된 장비의 제작과 수입이 러쉬를 이루었다.
‘77년도의 가장 큰 뉴스는 당연히 고 고상돈씨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되겠지만, 국내산악계에도 이에 필적할 만한 3대 빅뉴스가 발생하였다.
첫째로는, 크로니 산악회의 토왕폭 상하단 초등(1월12일 02:00)이다. 이때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씨외 7명을 비롯하여 동국 대학교에서도 작년 하단초등에 이어 상단을 준비중이 었고, 이밖에 에코클럽과 부산 합동팀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크로니의 발빠른 등반으로 인해 초등의 영광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 당시 크로니 산악회에서는 자신들의 등반으로 인해 우수한 등반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낙빙으로 인해 등반을 하지 못한 타팀들에게 미안함과 함께 초등의 영광을 같이하고 싶다는 논평을 내었다. 이야말로 진정 산악인다운 자세요, 알피니즘의 구현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그 동안 장비 제작에 전념하던 M.K. 모래내 금강 김수길씨의 별세다. ’65년 도 부터 동대 산악부의 오영복씨와 픽켈, 아이젠의 제작에 전념하여 왔으며, ‘76년도 동대산악부의 토왕폭 등반시 뛰어난 픽켈을 제조(픽켈명:토왕성)하여 등반성공에 기여하였고 그 기술이 일본에 까지 전해져 일본의 히말라야 원정대에서도 주문이 오곤하였다.
지금도 M.K.의 장비는 산악인들 사이에 보물로 취급될 뿐 아니라 당시 제작한 토왕성 픽켈은 너무 얼음에 잘 박힘으로 오히려 등반에 방해가 될 정도로 인기를 한 몸에 안았으나 소량만 제작한 관계로 그 성능을 실험해 본 산악인이 많지 않았음이 유감이다.
세째는, ’74년도부터 시작한 암벽 등급 그레이드 조사가 완료되어 공청회를 가진것이다. ‘74년 부터 악우회를 비롯한 7개 단체가 시작하였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76년 3월 부터 악우회(김기문)가 독자적으로 준비하여 완료되었다.
이러한 결실들을 모아 “한국의 암벽”이란 암벽코스 소개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일본의 하세가와가 번역하여 일본 클라이머들에게도 필수 지참서가 되었다.
이외에도 인수봉취나드 A.B.코스를 개척한 이본.취나드씨가 내한하여 자신이 제작한 요세미테와 피츠로이등반에 관한영화를 상영하였다.
‘78년에는 특이한 산일지가 나타나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토왕폭 상.하단을 악우회에서 12시간 30분만에 완등함으로써 당일 등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오늘날 시간단위 등반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성균관대에서는 설악산 1,275봉을 적설기에 등반하였고 청화 산악회에서는 소백산맥 543km를 최초로 동계에 종주함으로써 향후 남난희씨의 단독 종주로까지 이어지게 되며 산맥의 개념에서 백두대간 등의 개념으로 국토의 우리말 규명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79년에는 크로니의 전북 부안 깃대봉 초등과 경동 O.B. 산악회의 선인봉 재원길 개척등이 있었으나, 특별한 이슈는 없었고 다만 서울시에서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의 서울 시립공원화 계획이 발표되었다.
현재는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1970년대를 마무리하는 한해는 비교적 조용히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