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6,440]/Reference Room

[스크랩] 인수봉 초증정의 진실(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교장선생님 글)

뭉게구름™ 2013. 1. 14. 11:23

인수봉 초등, 기록되지 않은
등반과 기록된 등반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가장 오래된 기록
서울시민이 매일 대하는 북한산 인수봉(仁壽峰·803m)은 서구적 의미의 근대등산관에 바탕을 둔 알피니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발을 붙인 곳이다. 그래서 인수봉을 한국 알피니즘의 발원지라 부른다.
북한산에 올라 인수봉의 위용을 바라보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한해 5백만 명이 북한산을 찾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 인수봉에 오른 사람보다 오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원로 산악인은 사람을 구분할 때 인수봉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한다고 말했다. 그가 내린 이 오만한 정의는 그래서 인수봉의 가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이 봉우리를 처음 올라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그동안 불확실한 기록과 구전만 무성했을 뿐 명확한 근거자료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의문은 궁금증만 증폭시키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설왕설래만 거듭해 왔을 뿐 아직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926년 영국산악회에 제출한 아처의 <한일등반기> 표지

사람이 인수봉을 오른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45년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第1)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가 기원 전 18년에 열 명의 신하를 이끌고 부아악에 올라 살 곳을 살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도 인수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특수한 장비와 등반기술을 구사해야 하는데, 2000년 전에 이처럼 험난한 암벽을 10명의 신하를 이끌고 올랐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온조의 부아악 등정은 백제의 건국설화로 볼 수밖에 없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설화치고는 그 내용이 사뭇 구체적인 점에 의문이 앞선다.
인수봉은 ‘아기를 업은 모습과 같다’ 해서 옛 부터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렀다. 그러나 부아악이 지금의 인수봉이라는 통념과 달리 부아악은 북한산의 인수봉이 아닌, 경기도 용인에 있는 부아산(404m)이라는 이견이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가 직산 위례성이라면 용인의 부아산과 직산은 불과 1백리 남짓한 근거리에 있다. 용인 부아산에 오르면 직산의 도읍지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아악이 북한산의 인수봉이라면 이곳에서 2백 여리나 떨어진 직산을 살펴본다는 것은 지형조건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도읍지를 살펴본 산은 용인의 부아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상륙한 첫 지점인 안성천 하구의 미추홀(忠南 牙山郡 仁州面  密頭里 浦口)은 안성천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도읍지를 물색하러 안성천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 용인 부아산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용인 부아산은 북한산의 인수봉에 비해 현대인이나 옛사람이나 암벽등반기술 없이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라는 점 때문에 부아악은 인수봉이 아니라는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의 복원은 경험세계에서 가능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견해이고 보면, 온조가 오른 부아악은 북한산의 인수봉이 아니라 용인의 부아산이라는 의견도 타당성이 있다.

 

기록되지 않은 등반들
1920년대 후반부터 재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서구 알피니즘의 물결은 서울근교의 북한산과 도봉산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 외국인들에 의해 인수봉 등반이 시작되고 있었다. 1924년 봄부터 인수봉 아래 백운암굴에서 기거해온 이해문(현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씨의 조부)씨의 증언에 따르면 인수봉 정상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쌓은 돌탑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북한산을 찾는 서양인들 중에 언더우드(Underwood·한국명 원한경(元漢慶)) 일행이 1927년경 인수봉을 오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사실은 그 후 언더우드의 아들에 의해 확인되었으나 이들은 인수봉 등반 후 근거가 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아 사실 여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3대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이다.
또 하나의 초등정 설은 재한 일본인들이 결성한 조선산악회 창립(1931년) 멤버로 한국에서 선구적인 등반활동을 펴오던 이이야마 다스오(飯山達雄)가 구전으로 전한 영국인 아처(Cliff Hugh Archer)와 하야시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한국인 임무(林茂)의 1926년 5월 초등정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은 이이야마의 구전을 근거로 하고 있어 정확한 연대와 등반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이이야마가 전해준 아처와 임무의 초등정 설은 1927년 이이야마가 임무와 함께 인수봉 정상에 올라 임무가 3개의 바위사이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을 확인하였으니 임무가 초등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영국인 아처가 촬영한 1920년대의 인수봉 전경. 사진 산악문화

이이야마의 증언은 2차 대전 패전과 함께 본국으로 귀국한 그가 1971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월간 <산>(1971년 12월호 수록)이 주관한 좌담회에서 임무의 초등정을 밝힌다. 그러나 이이야마가 밝힌 임무의 초등정은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신빙성이 없다. 임무의 1926년 초등설에 대해 <韓國登山史>(이마운틴, 2010년 8월 간행)를 펴낸 손경석씨는 이런 기록이 이이야마의 저서<나의 베거본드 2만Km>와 당시 경성제대 산악부 리더를 지낸 이즈미 세이찌가 펴낸 <먼 산들>(新潮社 昭和 46년 간행)이란 회고록에도 기술되어있다고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이야마가 펴낸 저서에 임무의 인수봉 초등정 기록이 수록되어있는지조차도 의문이다. 한 번도 그런 내용이 공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즈미가 펴낸 <먼 산들> 24쪽의 ‘서울시 근교의 산’ 편을 보면, ‘조선에서 스포츠 알피니즘의 열기는 북한산 인수봉의 초등반에 의해 그 열전이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만약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초등반은 林某氏 일행에 의해 행해졌다. 중학 3학년생인 내 앞에는 이러한 시대의 이러한 산들이 우뚝 서 있었다.’ 라고 구전을 근거삼아 기술하고 있을 뿐이어서 임무의 초등설을 공식기록으로 인정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임무 자신이 남긴 등반기록은 전혀 없으며, 이즈미의 회고록이나 이이야마의 구전을 통해서 임무의 행적이 알려졌을 뿐이다. 또한 이이야마는 자신이 인수봉에 오른 확실한 연도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이이야마 방한 당시 좌담회에 참석했던 최선웅씨가 전하고 있다.
1920년대에 활동했던 임무의 행적에 대해서는 우리 산악계에 알려진 바 없다.
조선산악회가 발간한 <朝鮮山岳> 창간호 53쪽 조선산악회 창립총회(1931년10월 28일) 참석자 명단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을 뿐이며, 이이야마의 방한 좌담회에서 경력이 소개된 것이 전부다. 임무는 한국인으로 그 당시 성대 예과 스키산악부와 경성제대 산악부를 창설할 때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었으며, 이이야마가 임무를 처음 만난 것은 도봉산 천축사라고 회고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줄을 매는 파트너가 됐다. 임무는 스키등반 중 부상을 입고 등반활동을 중단하였으며, 1933년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가 1920~30년대 한국의 산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근대적인 등반방식에 의한 등반활동을 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인수봉 초등 여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가능성이 희박하다.

 

기록된 등반의 초등자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으로는 1936년 영국산악회에 제출된 아처의 <한일 등반기(Climbs in Japan and Korea)>에 수록된 인수봉 등반기가 가장 명확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1995년 영국산악회의 고문서(古文書)실에 별도로 보관되어 오던 것을 찾아내어 공개한 것이다. 이 기록의 발견으로 종래의 여러 설들과 ‘임무의 초등정설’이 근거 없는 구전이었음을 명확하게 매듭지어 주었다.
아처는 1926년이 아닌 1929년에 처음 인수봉에 올랐으며, 함께 오른 사람도 한국인 임무가 아니라 영국인 페이시(F.R Pacey)와 일본인 야마나카(S.Yamanaka)라는 사실이 이 기록에 의해 밝혀져 그동안 논란을 거듭해왔던 여러 등정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은 자명하다. 임무는 아처와 함께 인수봉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처가 알파인클럽에 제출한 기록은 근대적 의미의 등반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기록상의 초등정이라 할 수 있다. 아처는 인수봉 등정 당시 경성주재 영국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근무했으며, 영국의 외교관으로 1919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근무했었다. 아처가 인수봉을 처음 본 것은 1922년이었으며, 그는 인수봉 등반에 성공하기까지 여러 차례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을 탐색했다.
아처가 자신이 기록한 보고서에서 밝힌 바 있듯이 그는 등반루트 탐색 도중에 누군가 정상에 올라가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그 사람이 어떤 길로 올랐으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밝혀 아처가 오르기 전에도 다른 사람이 이미 올랐음을 밝혔다. 이 보고서의 내용에도 밝혔듯이 아처가 오르기 전에도 누군가가 인수봉에 오른 것이 확실하다.
또한 아처의 등반기에도 구전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신원미상의 사람이 인수봉 정상에 올라가 깃발을 꽂았으나 순검(경찰)이 깃발을 뽑아오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아처가 구전으로 전해들은 이 이야기는 아처보다 30년이나 앞선 1889년 10월에 북한산을 찾은 대한제국의 법무대신을 지낸 신기선이 쓴 <유북한산기(遊北漢山記)>에 아처가 전해들은 이야기와 일치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북한산의 경승을 구경하던 신기선은 그를 안내하던 순검으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영남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혼자 인수봉에 올라 깃발을 꽂았다는 내용을 <유북한산기>에 남겨놓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처 이전에도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을 뿐 인수봉에 오른 사람은 여러 명이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단지 기록되지 않은 등반이었을 뿐이다. 
아처의 등반기는 기록된 등정일 뿐이다. 그 이전인 조선왕조 때에도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 정상에 세워진 돌탑은 북한산의 사찰에서 수도하던 젊은 승려들이 신앙심에서 인수봉에 올라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도 있다.
인수봉 초등자와 임무의 행적을 밝혀내는 일은 우리 산악계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다. 심도 있는 연구와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기를 기대해 본다. ⓜ

만경대 암봉에 선 일본인 야마나카. 아처와 함께 1929년 인수봉을 오른 인물이다.

출처 : 우이코오롱스포츠
글쓴이 : 김현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