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진정한 파트너" 자일파트너, 흔히 오랫동안 함께 등반활동을 해온 사이라면 자일을 통해 상대방의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등반 중 추락했을 때 살아나려면 자일파트너가 줄을 잡아주어야 가능하다. 때문에 산꾼들 사이에서 얼마나 절친한 사이인가를 논할 때 자일을 함께 묶고 바위해본 적이 있는 사이인가 묻곤 한다. 그만큼 자일파트너란 산악인들에게는 남다른 사이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이 진정한 나의 자일파트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클라이머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정한 자일파트너란 그만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랫동안 등반을 함께 해온 최승철씨(28·백산회)와 김형진씨(25·대산련 경기북부지부 구조대원) 두사람은 멋진 자일파트너로 꼽을 만한 클라이머들이다.
이들의 등반 활동은 매우 치열했다. 바위에 한창 맛들였을 무렵 집에서 각자 쌀 한 말씩 짊어지고 나와 전국 암장을 순례함으로써 이미 극성스런 등반욕을 암시했던 두사람은 의정부 불곡산 골수암에 20개의 고난도 프리클라이밍 루트를 개척하는가 하면, 설악산 갱기폭과 장군봉, 적벽에 인공등반 루트를 내기도 했고, 올해는 설악산 개토왕폭과 의정부 산학폭에 혼합등반루트를 개척하기도 했다. 국내의 암빙벽 뿐만 아니라 요세미티의 대암벽에서도 뛰어난 등반을 해낸 두사람은 지난해에도 큰 일을 해냈다. 파키스탄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대암탑인 크레이트 트랑코타워 하단벽에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 라는 새 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여성을 포함, 혼성3인조가 이룩한 이 등반은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조성대)의 가셔브룸4봉 서벽 새 루트 개척과 함께 지난해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등반을 대표하는 등반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등반활동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서로 배짱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랬다. 처음 만난 것은 군복무중이던 최승철씨가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두 사람의 생활터전인 의정부에서 등산장비점을 운영하는 선배가 "너와 비슷한 놈이 있으니 만나봐라"는 말에 따라 최씨가 김씨를 만났을 때, '산에 대한 열정이 나보다 더한 놈을 만났다' 싶었다. 김형진씨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싶었다. 당시 김형진씨는 골수암에 '꼴값길'이란 루트를 개척하던 중이었다. 김씨의 등반 모습을 지켜보던 최씨는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바위에 다가섰지만 어림도 없었다. '내가 이 정도도 못하나' 싶은 생각에 최씨는 어깨가 축 처졌다. 이 때 김형진씨가 다가와 "형 ! 3년동안 군대 있었기 때문에 몸이 굳었을 거예요. 제대하면 나보다 나을 테니까 염려마세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때부터 동지애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은 자일 파트너의 길을 걷게 된다. 최씨는 제대하자마자 김형진씨와 함께 전국 암장 순례를 떠났다. 쌀 한 말과 차비만 달랑 들고 시작한 암장 순례였다. 암장에서는 텐트를 치고 지낼 수 있었지만, 장소를 옮길 때는 역대합실에서 밤을 보낸 적이 허다했다. 외국의 거벽등반을 꿈꾸던 두 사람은 '자유등반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했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 혼자했다면 창피해서 중간에 그만두었을 겁니다. 어쨌든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위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곤 지방의 산 선배들이 도와주곤 했으니까요." 당시 두 사람의 목표는 최고의 클라이머로 통하던 이근택(40), 정승권씨(38 허큘리스월 대표)보다 나은 클라이머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고등급이었던 5.12급 루트에 막상 붙어보면 어림도 없었다. 때문에 암벽순례를 마친 다음에는 자연암벽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 정승권씨의 실내인공암벽에서 훈련을 쌓았다. 두 사람이 바위에 한창 빠져 지낼 즈음이던 93년 가을, 이번에는 김형진씨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김씨는 군에 입대하면서 최승철씨와 약속을 굳게 했다. "선배들 보니까 군대 갔다오면 직장이나 결혼 문제 때문에 산을 떠난다"며, "만약 형이 변하지 않는다면 제대한 다음 트랑고타워를 등반하자"고.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대산련 경기북부 사무실에 걸려 있는 사진 한번 본 것이 고작인 트랑고타워를 등반하자고 약속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정말 절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약속을 해놓지 않으면 제대 후에 산에 다닐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김형진씨가 군에 있는 사이 최씨는 더 열심히 등반했다. 94년에는 혼자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을 찾았다. '형진이 몫까지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최씨는 최고 수준의 루트라는 엑스컬리버와 트리플다이렉트를 단독으로 등반해냈다. 하지만 너무 힘들고 뭔가 허전했다. 바위의 어려움보다 바위에서의 고독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바위도 좋았지만 파트너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등반 또한 즐거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혼자서 등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그리고 형진이가 그렇게 보고 싶더군요. 그래서 엽서를 보냈죠. 제대하면 함께 요세미티를 등반하자고-"
제대하자마자 두 사람은 또다시 붙어다녔다. 입대 직전 해결하지 못했던 루트의 문제점을 하나 둘 풀어내고, 또 다른 미답의 대상지를 찾아 나섰다. 설악산 기정길도, 갱기폭 좌우벽과 소승폭 벽등반 루트도 이때 해결했다. 96년과 97년에는 엽서의 내용대로 요세미티도 찾았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두사람은 드디어 그 어설프게 맺은 약속을 지켰다.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를, 그것도 새 루트를 개척하면서 성공적으로 등반해냈다. 물론 그에 앞서 요세미티 거벽을 함께 등반했지만, 트랑고타워 등반은 특별했다. 약속도 지키고, 그와 동시에 두사람 모두 처음으로 6,000m대의 고산 거벽 등반에 성공한 것이고, 더 나은 등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진이는 등반대상지를 정할 때부터 등반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천한다." "승철이 헝은 극단적이지만 모든 면에서 나보다 순수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이 말에서 두 사람의 성격이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는 면에서는 같다. 즉 고집스런 면만큼은 똑같아 처음 대하는 루트만 보면 서로 먼저 등반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럴 땐 결국 가위바위보로 선등을 결정하게 된다. "아마 서로 만나지 못했다면 벌써 산을 그만 다녔을 것" 이라는 두 사람은 이제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최승철씨는 "아무리 어려운 루트라도 형진이와 함께 줄을 묶으면 안심이 된다"며 파트너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트트랑고타워를 등반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파트너간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선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파트너가 편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등반을 한다면 과정은 매우 즐겁고 결과는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최승철씨와 김형진씨는 이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큰 등반을 끝내고 나면 가까웠던 사이도 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두 사람은 정반대로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등반에 관한 한 평생 파트너가 된 것이다. 최승철씨는 몇 해 전 의정부에 실내 인공암장인 샤모니를 개설했다. 샤모니는 조금이라도 가까운 데서 운동을 하고 또한 의정부를 비롯한 경기 북부지역의 스포츠클라이밍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생각에서 만든 것이다. 최씨는 "샤모니가 몇 해동안 적자를 면치 못해 고민이 많았다"며, 그러나 "후회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최승철씨와 김형진씨는 등반기술 전수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여러 차례의 요세미티 등반과 그레이트트랑고타워 등반에서 얻은 경험을 여러 산악인들과 나누기 위해 '익스트림 라이더'라는 거벽등반교실도 열고 있다. 두사람이 등반교실을 개설한 데는 두 가지 목적에서다. 첫번째가 기술전수라면, 두번째는 새로운 동지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의 등반은 앞으로 치열할 것이다. 계획도 많다. 올 여름 새 루트를 노리고 탈라이사가르(6,904m) 북벽에 도전한다. 봉우리가 험난하여 인도 히말라야의 여러 봉들 가운데 상당히 늦게 등반된 봉이다 .북동릉, 북서릉, 북벽등 세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지만, 북벽은 91년 헝가리 팀이 초등했고, 다이렉트 루트는 지난해 들어서야 오스트리아 팀이 뚫었다. 한국 팀은 6차례나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 난봉이다. 겨울에는 알프스 등반에 나선다. 알프스에서는 개척 등반이 거의 끝난 상황이라고 판단한 이들은 연장등반으로써 극한에 도전한다. 드류 서벽 6개 루트를 쉼없이 이어서 등반하는 것이다. 이밖에 이들이 하고픈 등반은 수도 없이 많다. "천여m 높이의 수직벽이 수없이 솟아 있는 캐나다의 배핀아일랜드도 언젠가는 등반하고 싶은 곳 중 하나입니다. 세계 암벽 순례도 했으면 하고요. 아무튼 이제는 새롭고 다양한 각도에서 등반을 펼칠까 합니다." 두 사람의 등반순례의 끝을 벌써 이야기할 피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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