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멕클린(Don McLean)의 빈센트(Vincent)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에서 돈 멕클린은
1960년대 월남전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 참가해 수많은 젊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자신의 조국을 비판한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 가수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돈 멕클린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비판이었습니다. 고흐의 예술 세계를 찬미하며 부른 노래가 빈센트(Vincent)입니다.
세상을 살다 간 많은 화가들이 있었지만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만큼이나 불행했던 화가가 또 있을까요. 가난과 절대 고독 그리고 강박. 그래서일까요. 대한민국의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킬로만자로의 눈>이라는 노래를 통해,
고흐는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권총자살로 죽음을 맞이하는 37세까지 불꽃처럼 이 세상을 살다 갔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27세부터 37세까지 불과 10여 년 정도였습니다.
고흐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화상이었던 그의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원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화상이라는 직업이 그림을 판매하는 장사인지라 장사 수단이 적었던 고흐는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합니다.
고흐는 탄광촌의 척박한 노동현실을 보며 분노했고 급기야 노동운동에도 참가 하게 됩니다. 전도위원회로부터 파면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들의 암담한 현실은 고흐의 인물화를 통해 승화 됩니다.
’시골 여자’’아기 보는 여자’ 등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일상에서 만나던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이었습니다. 특히 동공을 사실보다 크게 확장시켜 표현했는데 이는 민중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열정을 동공으로 승화 시킨 것이었습니다.
화가로서의 명예와 부 또는 생계를 얻기 위해서는 귀족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귀족들이 그림을 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의 소재는 귀족들의 입맛에 맛는 인물화나 자연 풍광 따위들이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말하는 동물이자 일을 시킬 수 있는 동물에 불과한 서민들을 소재로 한 고흐의 그림을 귀족들이 사 줄리 만무했습니다. 귀족들의 외면과 극단적으로는 고흐가 그린 그림이 닭장의 문으로 걸리는 등 동시대인들로 부터 몰이해의 정점에 서 있었으니, 고흐가 살아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두 작품 뿐이었습니다.
형과 668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평생토록 돈독한 우애를 갖었던 동생 테오가 그림을 팔고 사는 화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두 편의 그림만이 판매되었다면 그가 그린 그림이 얼마나 냉대를 받았는지를 측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테오는 평생토록 형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훗날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그림이 될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1월 12일 작품 <불꽃>(Les Iris)이 소더비 예술품 경매에서 3억2천만프랑(약 768억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값으로 기록되었으니 테오의 믿음은 100년 후에 사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고흐가 겪은 가난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자화상을 반복해 그려야만 했고, 하루 이틀 정도의 끼니를 거를 만큼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고흐가 물감을 사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뒷바라지를 했던 동생 테오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고흐의 그림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독한 화가였습니다. 그와 우정을 나눈 고갱과 1888년 10월에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심한 성격차이로 인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고흐는 그 해 12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어느 날은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의 발작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하면 그림을 그리고 또다시 발작이 시작되면 다시 입원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그린 그림이 '셍레미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de Saint-Remy)'입니다.
90년 5월 남프랑스에 있던 그는 파리로 돌아와 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특히 사흘 만에 초고속으로 완성된 <의사 가셰박사의 초상>은 그가 자살하기 전의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1897년 당시 58달러에 판매된 이 그림은 100년도 채 안된 1990년 5월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낙찰돼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는 1890년 7월 27일 권총자살을 기도해 3일 뒤인 7월30일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오베르 쉬즈 성당 위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가 인류에 남긴 유산은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875점의 회화와 1,100점의 데셍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그의 동생 태오도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고흐 사망 6개월 후에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형의 무덤 곁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 불행은 인류에게 값진 축복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는 왕과 귀족에게 빼앗겼던 예술을 소외 되고 억압 받는 민중에게 되돌려 준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거침없는 자유였습니다.
돈 멕클린은 빈센트(Vincent)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노래 합니다.
Now I think I know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유롭게 되고자 노력했는지
그리고 '빈센트'를 부른 '돈 맥클린'을 흠모해 만들어진 노래가 있지요. 바로 이 곡입니다.
Strumming my pain with his fing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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