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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가 남긴것은 그림만이 아니었다...

뭉게구름™ 2012. 9. 1. 09:59

 

 

 

돈 멕클린(Don McLean)의 빈센트(Vincent)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에서 돈 멕클린은
bye, bye, missed American pie(잘가라, 잘 가라 실패한 미국 파이여)라며,
노랫말을 통해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1960년대 월남전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 참가해

수많은 젊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자신의 조국을 비판한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 가수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돈 멕클린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런 돈 멕클린이

고흐의 예술 세계를 찬미하며 부른 노래가 빈센트(Vincent)입니다.

 

세상을 살다 간 많은 화가들이 있었지만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만큼이나 불행했던 화가가 또 있을까요. 

가난과 절대 고독 그리고 강박.

그래서일까요.

대한민국의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킬로만자로의 눈>이라는 노래를 통해,
' 나보다도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이도 있었다'고 그의 아픔을 노래했으니,
 

150년 전의 사람
 고흐는 이 노래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고흐는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의 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권총자살로 죽음을 맞이하는 37세까지

불꽃처럼 이 세상을 살다 갔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27세부터 37세까지 불과 10여 년 정도였습니다.

 

고흐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화상이었던 그의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원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화상이라는 직업이 그림을 판매하는 장사인지라

장사 수단이 적었던 고흐는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합니다.

 

고흐는 탄광촌의 척박한 노동현실을 보며 분노했고

급기야 노동운동에도 참가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곧 전도사가 노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도위원회로부터 파면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들의 암담한 현실은 고흐의 인물화를 통해 승화 됩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우편배달부 베 짜는 사나이

시골 여자’’아기 보는 여자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일상에서 만나던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이었습니다.

특히 동공을 사실보다 크게  확장시켜 표현했는데

이는 민중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열정을 동공으로 승화 시킨 것이었습니다.

 

화가로서의 명예와 부 또는 생계를 얻기 위해서는

귀족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귀족들이 그림을 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의 소재는

귀족들의 입맛에 맛는 인물화나 자연 풍광 따위들이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하는 동물이자 일을 시킬 수 있는 동물에 불과한

서민들을 소재로 한 고흐의 그림을 귀족들이 사 줄리 만무했습니다.

귀족들의 외면과 극단적으로는 고흐가 그린 그림이 닭장의 문으로 걸리는 등

동시대인들로 부터 몰이해의 정점에 서 있었으니,

고흐가 살아 생전에 팔린 그림은 유화 두 작품 뿐이었습니다.

 

형과 668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평생토록 돈독한 우애를 갖었던 동생 테오가

그림을 팔고 사는 화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두 편의 그림만이 판매되었다면

그가 그린 그림이 얼마나 냉대를 받았는지를 측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테오는

평생토록 형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훗날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그림이 될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1월 12일 작품 <불꽃>(Les Iris)이

소더비 예술품 경매에서 3억2천만프랑(약 768억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값으로 기록되었으니

테오의 믿음은 100년 후에 사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고흐가 겪은 가난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자화상을 반복해 그려야만 했고,

하루 이틀 정도의 끼니를 거를 만큼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고흐가 물감을 사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뒷바라지를 했던 동생 테오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고흐의 그림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독한 화가였습니다.

그와 우정을 나눈 고갱과 1888년 10월에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심한 성격차이로 인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고흐는 그 해 12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어느 날은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의 발작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하면 그림을 그리고 또다시 발작이 시작되면

다시 입원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그린 그림이

'셍레미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de Saint-Remy)'입니다.

 

90년 5월 남프랑스에 있던 그는

파리로 돌아와 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특히 사흘 만에 초고속으로 완성된 <의사 가셰박사의 초상>은

그가 자살하기 전의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1897년 당시 58달러에 판매된 이 그림은

100년도 채 안된 1990년 5월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낙찰돼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는 1890년 7월 27일 권총자살을 기도해

3일 뒤인 7월30일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오베르 쉬즈 성당 위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가 인류에 남긴 유산은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875점의 회화와 1,100점의 데셍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그의 동생 태오도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고흐 사망 6개월 후에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형의 무덤 곁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고흐의 인생은 너무나 불행했지만,

그 불행은 인류에게 값진 축복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는 왕과 귀족에게 빼앗겼던 예술을

소외 되고 억압 받는 민중에게 되돌려 준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그러기에 고흐가 그린 것은 온전히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자

거침없는 자유였습니다.

 

돈 멕클린은 빈센트(Vincent)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노래 합니다.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
Perhaps they never will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롭게 되고자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이제는 듣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빈센트'를 부른 '돈 맥클린'을 흠모해 만들어진 노래가 있지요.

바로 이 곡입니다.

 

 

Strumming my pain with his fingers
나의 고통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Singing my life with his words
내 삶을 노래하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그의 노래에 흠뻑 빠져서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그의 노래에 흠뻑 빠져서
Telling my whole life wiht his words
그의 말로 내 삶을 노래하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그의 노래에 흠뻑 빠져서

I heard he sang a good song
그는 노래 잘하고
I heard he had style.
독특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기에
And so I came to see him listen for a while
그를 보러 갔습니다. 그래서 잠시 들었고
And there he was this young boy
A stranger to my eyes
그는 나의 눈에는 참 낯선 젊은이처럼 보였습니다

I felt all flushed with fever
청중들에 의해 적잖히 당황하고
In there is vital crowd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I felt he found my letters
그가 나의 메모쪽지를 발견하고는
And read each one out loud
글을 크게 하나씩 읽는것이었습니다.
Afraid that he would finish
노래는 이제 끝났구나 하고 걱정했지만
But he just kept right on
그는 계속 노래를 부릅니다.

He sang as if he knew me
In all my dark despair
그는 나의 깊은 절망을 알고 있다는듯이 노래를 합니다.
And then he looked right through me
As if I wasn't there
내가 없는것처럼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And he just kept on singing
노래를 계속 합니다
Sining clear and strong.
투명하고 강한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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